오페라

34. 오페라 속 실화 이야기들 (3) 안나 볼레나, 루이자 밀러,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world1info 2025. 5. 2. 23:41

5. 도니체티의 《안나 볼레나(Anna Bolena)》: 튜더 왕조의 비극적 여왕

실존 인물: 앤 불린(Anne Boleyn, 약 1501~1536)

도니체티가 1830년에 작곡한 《안나 볼레나》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비극적 운명을 다룬 역사 오페라입니다. 앤 불린은 실제로 1536년 간통 및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으며, 딸 엘리자베스 1세를 낳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종교개혁, 왕권 강화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 속에서 왕비로 등극했다가 결국 권력의 희생양이 된 여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페라에서의 구성과 실화와의 관계

도니체티의 오페라는 안나 볼레나가 몰락해가는 심리적 여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줄거리는 그녀의 과거 연인 퍼시(영국 귀족 헨리 퍼시 경), 그녀를 대신해 왕의 애첩이 되는 제인 세이무어(세 번째 왕비) 사이에 얽힌 갈등과 배신, 그리고 왕 헨리 8세의 냉혹한 권력 행위를 강조합니다.

실제 역사와 비교했을 때 몇 가지 차이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오페라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앙리 퍼시'와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확실하지 않으며, 그의 극적인 등장 역시 사실보다는 극적 효과를 위한 설정입니다. 반면, 제인 세이무어와 헨리 8세의 관계나 앤 불린이 간통과 반역 혐의로 처형된 점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합니다.

또한, 도니체티는 안나 볼레나의 심리 묘사에 집중해, 그녀를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왕비로서의 자존심과 내면의 고통을 간직한 입체적 인물로 그립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안나는 과거의 환영에 시달리며 정신적으로 무너져가는 모습으로 무대에 남게 되는데, 이는 그녀의 죽음을 비극적이면서도 존엄하게 표현한 도니체티 특유의 감성적 접근입니다.

역사적 인물의 이미지와 오페라의 예술적 해석

앤 불린은 역사적으로도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입니다. 어떤 기록에서는 그녀를 정치적 야심가로, 또 어떤 기록에서는 종교개혁과 여성 권리 측면에서 상징적 존재로 보기도 합니다. 도니체티는 이런 복합적인 이미지를 단순화하지 않고, 내면적 고뇌와 궁정 내 정치적 소외, 여성으로서의 인생을 하나의 인물에 통합시켜 보여줍니다.

《안나 볼레나》는 도니체티의 '여왕 삼부작'의 첫 번째 작품으로, 이후 《마리아 스투아르다》, 《로베르토 데브뢰》와 함께 여성 통치자의 비극을 연속적으로 조명합니다. 이 작품은 역사와 오페라의 경계를 예술적으로 넘나드는 방식으로, 정치적 사건이 아닌 개인적 고통을 중심에 놓고 실존 인물을 해석합니다.

 

34. 오페라 속 실화 이야기들 (3) 안나 볼레나, 루이자 밀러,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6. 베르디의 《루이자 밀러(Luisa Miller)》: 시민 사회 속의 권력과 계급 갈등

실존 인물과 원작

《루이자 밀러》는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의 희곡 《간계와 사랑(Kabale und Liebe, 1784)》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실존 인물을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계몽주의 후기 독일 사회의 정치적 현실과 귀족-시민 계급 간 긴장 관계를 강하게 반영했습니다. 실러의 작품은 18세기 말 독일에서 실제로 빈번하게 발생했던 권력 남용, 부패한 궁정 정치, 그리고 귀족과 평민 간의 결혼 문제 등을 다루며, 당시 현실을 비판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오페라에서의 구성과 사회적 맥락

베르디는 1849년 이 작품을 오페라화하면서, 이탈리아 통일운동과 시민 계몽이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습니다. 루이자 밀러는 평민의 딸로, 귀족인 로돌포와 사랑에 빠지지만 두 사람의 계급 차이와 로돌포의 아버지인 백작의 정치적 야욕 때문에 비극적 결말을 맞이합니다.

이 작품은 실존 인물보다는 실존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루이자는 실러의 원작처럼 순수하고 도덕적인 인물로 묘사되며, 그녀를 중심으로 권력에 의해 억압받는 개인의 고통이 드러납니다. 베르디는 루이자의 부친 밀러와 귀족 권력자의 대립을 통해, 당시 이탈리아에서 고조되고 있던 시민계층의 정치적 불만과 통일운동의 정서를 은유적으로 담아냈습니다.

역사적 맥락과 오페라의 미학

베르디는 정치적 검열이 심했던 오스트리아 지배 아래에 있던 이탈리아에서 우회적으로 민족주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습니다. 《루이자 밀러》는 겉으로는 개인적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배경에 깔린 계급 투쟁과 부패 권력에 대한 비판은 매우 분명합니다.

또한 음악적으로도 극적 긴장과 감정의 절제가 잘 조화를 이루며, 초기 베르디 작품의 특징인 민중적 정서와 드라마적 직설성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아리아 "Quando le sere al placido"는 로돌포가 사랑과 의심, 분노 사이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절절하게 표현하며, 이 작품의 중심 갈등을 극적으로 이끌어갑니다.

《루이자 밀러》는 실존 인물 자체를 모델로 하지는 않았지만,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삼은 정치사회적 오페라로서, 실러의 계몽주의적 사상과 베르디의 민족주의 정서가 만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7. 주세페 베르디의 《시칠리아의 저녁기도(I vespri siciliani)》

실화 배경: 1282년 시칠리아 저녁기도 사건 (Vêpres siciliennes)

《시칠리아의 저녁기도》는 실존의 역사적 사건인 1282년 ‘시칠리아 저녁기도’ 봉기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입니다. 당시 시칠리아는 프랑스 앙주 왕조의 지배 아래 있었고, 프랑스 통치자들의 폭압과 불의에 분노한 시칠리아 민중은 3월 30일 부활절 월요일 저녁기도 시간에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는 시칠리아 전역으로 확산되며 프랑스인에 대한 대량 학살로 이어졌고, 앙주 왕조는 결국 시칠리아에서 퇴각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중세 유럽 민중 저항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꼽힙니다.

오페라의 구성과 역사적 해석

베르디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하여, 1855년 파리 오페라 극장의 요청에 따라 프랑스어 그랜드 오페라 형식으로 《Les vêpres siciliennes》를 작곡했으며, 이후 이탈리아어로 번안되어 널리 연주되었습니다. 작품은 시칠리아 귀족인 ‘몽포르 백작’과 그의 아들 ‘앙리’, 그리고 시칠리아 여성 ‘엘레나’를 중심으로 정치적 갈등과 민족 저항, 개인적 고뇌를 교차시킵니다.

흥미로운 점은 앙리가 프랑스 총독 몽포르의 아들이라는 설정입니다. 앙리는 시칠리아의 자유를 원하면서도 자신의 혈통과 충성 사이에서 갈등하고, 엘레나는 반프랑스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베르디는 이런 인물 구성을 통해, 단순한 역사 재현을 넘어서 국가와 가족, 정의와 사랑 사이의 긴장을 세밀하게 조명합니다.

역사와의 공통점과 차이점

  • 공통점: 오페라는 전체적으로 역사적 배경을 충실히 따르며, 프랑스 지배에 대한 시칠리아 민중의 불만, 폭압 통치자에 대한 반감, 급작스러운 봉기의 전개 등을 드라마의 근간으로 삼습니다.
  • 차이점: 역사적 사건은 집단 민중 중심이었던 반면, 오페라는 엘레나, 앙리, 몽포르 등 개인 중심의 서사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주인공 앙리의 존재는 허구이며, 그의 고뇌는 사건에 대한 인간적·도덕적 고민을 상징화하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베르디는 이 오페라를 통해 단순히 민족적 저항을 선동하려 한 것이 아니라, 민족 해방이라는 이상이 얼마나 복잡한 인간 감정과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검열이 극심했던 19세기 중반의 오스트리아 지배 하 이탈리아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빌려 우회적으로 민족의 자각을 고취하는 작품이 자주 등장했으며, 《시칠리아의 저녁기도》도 그 대표적 예입니다.

정치적 상징성과 음악적 특성

이 작품은 그랜드 오페라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베르디 특유의 이탈리아적 정서와 민중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대규모 합창, 웅장한 무대, 발레 삽입곡 등 당시 파리 오페라의 전형을 갖추었지만, 인물의 내면 표현과 긴박한 드라마 전개는 매우 베르디 답게 표현했습니다.

결말에서 주인공들이 결혼식을 앞두고 봉기가 시작되는 장면은, 개인의 행복이 민족의 고통과 맞부딪힐 수밖에 없는 비극적 현실을 상징합니다. 그 속에서 베르디는 단순한 역사 묘사 이상으로, 개인의 운명과 집단의 자유 사이의 모순된 관계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