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에서 작곡가의 역할은 음악을 통해 극적인 감정을 증폭시키는 것이고, 대본가(librettist)의 역할은 이야기를 구조화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두 예술가의 협업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우리는 위대한 오페라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오페라 역사 속에서 예술적 시너지를 발휘한 대표적인 협업 사례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 A. Mozart): 이성과 감성의 완벽한 결합
18세기 후반, 빈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탈리아 출신의 시인 로렌초 다 폰테는 모차르트와 만나 세 편의 오페라 걸작을 탄생시킵니다. 바로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1786), 《돈 조반니》(Don Giovanni, 1787), 《코지 판 투테》(Così fan tutte, 1790)입니다.
다 폰테는 뛰어난 언어 감각과 문학적 재치를 지닌 인물이었고, 이탈리아 전통 희극에 정통했습니다. 그는 복잡한 플롯과 재치 있는 대사를 통해 모차르트의 음악이 극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특히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계급 문제와 사회 풍자를 담아내며, 모차르트가 그것을 음악으로 생생히 표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돈 조반니》의 경우, 다 폰테는 스페인 전설 속 방탕한 귀족 '돈 후안'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욕망과 죄, 구원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그려냈습니다. 모차르트는 이를 극적으로 해석해,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장르의 오페라를 창조했습니다. 이는 '드라마 조코소'(dramma giocoso)라는 새로운 유형으로 불리며 이후 오페라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코지 판 투테》는 인간 관계와 사랑에 대한 아이러니와 유희를 다루며, 다 폰테의 철학적 통찰과 모차르트의 섬세한 심리 묘사가 빛을 발하는 작품입니다. 각 인물의 감정 변화를 음악적으로 정교하게 반영하며, 유쾌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남기는 이 작품은 이들의 협업이 얼마나 높은 수준의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의 협업은 단순한 작곡과 대본의 관계를 넘어, 서로의 예술적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보완한 창조적 동반자 관계였습니다. 다 폰테는 당시 유행하던 프랑스 희곡을 자유롭게 각색했고, 모차르트는 각 인물의 내면을 음악적으로 분석해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그 결과 이 세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 드라마 조코소(dramma giocoso): 이탈리아어로 유머와 비극적인 요소가 혼합된 오페라를 의미. 희극적이면서도 감정적인 드라마. 전통적인 오페라 부파와 오페라 세리아 사이의 중간 장르. 모차르트 오페라《돈 조반니》(Don Giovanni)가 대표적인 예.
2. 보마르셰(Beaumarchais)와 조아키노 로시니(Gioachino Rossini): 원작자의 영향력이 살아 숨 쉬는 협업
로렌초 다 폰테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의 원작은 프랑스 극작가 피에르 보마르셰(Pierre Beaumarchais)의 희곡 《피가로의 결혼》입니다. 이 희곡은 프랑스 혁명 전야에 귀족 사회에 대한 비판과 신분 질서를 풍자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보마르셰는 생전에 자신의 또 다른 희곡 《세빌리아의 이발사》(Le Barbier de Séville)를 다양한 작곡가들이 오페라로 만들도록 허락했지만, 이 중 조아키노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 1816)가 결정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로시니는 체사레 스테르비니(Cesare Sterbini)라는 대본가와 함께 이 희곡을 음악극으로 재구성했으며, 원작의 유머와 활기를 음악적으로 훌륭하게 살려냈습니다.
스테르비니는 희곡의 주요 줄거리와 등장인물을 충실히 유지하면서도 오페라 형식에 적합하도록 장면을 축소하거나 재배열했고, 로시니는 활력 넘치는 아리아와 앙상블, 리드미컬한 레치타티보로 극의 긴장감과 유머를 유지했습니다. 특히 주인공 피가로의 "나는 이 거리의 이발사" 아리아(‘Largo al factotum’)는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바리톤 아리아 중 하나로, 보마르셰의 캐릭터에 로시니 특유의 에너지와 유머를 더해 새롭게 재탄생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협업의 성공은 원작자, 대본가, 작곡가의 시너지가 어떻게 고전적인 희극을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입니다. 보마르셰는 직접 대본을 쓰지 않았지만, 그의 문학적 통찰과 시대정신을 담은 희곡 작품들이 오페라로 전이되었고, 스테르비니와 로시니는 이를 음악극으로 변환하여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3. 필립 퀴노(Philippe Quinault)와 장-밥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의 원형을 창조하다
17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필립 퀴노는 왕실 시인으로서 루이 14세의 후원을 받았으며, 장-밥티스트 륄리와의 협업을 통해 프랑스 오페라의 고유한 형태인 '트라제디 리리크'*(tragédie lyrique)를 확립합니다. 이 장르는 이탈리아 오페라 세리아와는 달리, 신화적 주제를 중심으로 서정성과 장중함을 중시하며, 무용과 합창, 연극적 구성 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입니다.
퀴노는 알렉상드랭**이라는 프랑스 고전 시 형식을 기반으로 극의 언어적 리듬을 정교하게 구성했고, 륄리는 이러한 대사를 음악적으로 탁월하게 표현하며 프랑스어의 억양에 맞는 새로운 오페라 양식을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륄리는 무용과 합창을 극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끌어들였고, 장면 전환을 부드럽고 아름답게 만들어 무대 예술로서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대표작인 《아르미드》(Armide, 1686)에서는 퀴노의 문학적 상상력과 륄리의 음악적 직관이 정점으로 융합된 결과를 보여줍니다. 퀴노는 중세 기사 이야기를 바탕으로, 마법과 사랑, 갈등의 서사를 전개했고, 륄리는 감정의 미묘한 변화와 심리적 긴장감을 음악으로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특히 주인공 아르미드의 내면적 갈등은 륄리의 유려한 선율과 레치타티보를 통해 풍부하게 전달되며,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의 전형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협업은 단순히 음악과 대본의 결합을 넘어서, 프랑스 궁정문화의 예술적 정체성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륄리-퀴노 콤비는 프랑스 오페라를 이탈리아의 영향력에서 분리시켜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시킨 선구자로, 이후 라모(Rameau)나 글루크(Gluck)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 트라제디 리리크 (tragédie lyrique): 프랑스 오페라에서의 서정적 비극을 의미. 비극적이고 감정적으로 깊이 있는 이야기 다룬 오페라. 프랑스 고전 오페라에서의 중요 장르 중 하나. 그리스 비극에서 영향 받은 작품들이 많으며, 대부분 고대 신화나 영웅 이야기를 다룸. 대표작으로는 장-밥티스트 륄리의 《아르미다》(Armide)나, 그르노의 《이피게니아와 아울리시스》(Iphigénie en Aulide)가 있음.
** 알렉상드랭(Alexandrine): 프랑스 고전 시에서 사용되는 운율 형식. 주로 12음절 라인으로 구성된 시구. 17세기 프랑스 문학에서 중요한 역할. 고전적 프랑스 시의 전통적 장르. 엄격한 규칙을 지키면서 세련된 표현. 각 음절이 강세와 약세의 규칙에 맞게 배열되어 리듬감 있는 운율 형성. 주로 강세가 짝수 음절에 자리하며, 경쾌하고 규칙적인 리듬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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