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와 루이지 일리카(Luigi Illica), 주세페 자코사(Giuseppe Giacosa): 삼각 협업으로 완성된 이탈리아 오페라의 정수
푸치니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마지막 거장 중 한 명으로, 드라마틱하고 감성적인 음악을 통해 사실주의 오페라(베리스모)의 정점을 찍은 인물입니다. 그의 대표작들은 모두 강렬한 서사와 극적인 캐릭터로 관객을 사로잡았는데,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루이지 일리카와 주세페 자코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기 다른 강점을 지닌 대본가로, 일리카는 줄거리 구상과 대사 초안을, 자코사는 문학적 표현과 언어 다듬기에 능했습니다.
이들의 협업은 《마농 레스코》(1893) 이후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푸치니는 《마농 레스코》의 대본 작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출판사였던 리코르디(Ricordi)의 주선으로 일리카와 자코사가 투입되면서 삼각 협업이 본격화됩니다. 이 첫 작품을 통해 가능성을 확인한 푸치니는 이후 《라 보엠》(1896), 《토스카》(1900), 《나비부인》(1904)으로 이어지는 걸작들을 함께 만들게 됩니다.
이 삼각 협업은 철저한 역할 분담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일리카는 극적인 줄거리 구성과 장면 구성을 맡아, 이야기의 뼈대를 만들고 장면 전개를 설계했습니다. 자코사는 이 틀 위에 문학적으로 정제된 대사를 덧붙이는 역할을 했으며, 시적 운율과 정서적 표현을 다듬는 데 집중했습니다. 푸치니는 음악적 관점에서 대본을 점검하고, 감정선에 맞춰 대사를 수정하거나 특정 장면을 강화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예를 들어 《나비부인》에서는 푸치니가 동양적 정서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도록 자코사에게 대사의 어감을 여러 번 수정해달라고 요구했으며, 자코사는 이를 수용해 음악과 대사의 리듬이 조화를 이루도록 다듬었습니다.
또한 세 사람은 함께 테이블에 앉아 대본을 검토하고 장면 전환, 클라이맥스의 타이밍, 음악적 강조점 등을 논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푸치니는 지나치게 산문적인 부분이나 극적 긴장감이 떨어지는 장면을 지적했고, 일리카와 자코사는 이러한 피드백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수정을 진행했습니다. 갈등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의 상호 보완적 작업은 푸치니 오페라의 세련되고 응축된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2. 벤저민 브리튼(Benjamin Britten)과 피터 피어스(Peter Pears): 창작과 삶의 동반자
영국 오페라의 부흥을 이끈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은 테너 가수 피터 피어스와 예술 안과 바깥에서의 삶 모두에서 파트너였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작곡가와 대본가의 사이는 아니지만, 단순한 협업을 넘어 서로의 정체성과 예술세계를 심화시키는 동반자적 관계였습니다.
두 사람의 협업은 1937년 브리튼이 작곡한 '온 션트' 등의 초기 음악에서부터 시작되었고, 1940년대에 들어 본격화됩니다. 《피터 그라임스》(1945)를 통해 이들의 창작 파트너십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피터 그라임스를 위해 브리튼은 피어스를 염두에 두고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피어스는 직접 대본을 쓰진 않았지만, 브리튼의 창작 과정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는 문학 작품을 함께 선정하거나 특정 장면에서의 감정선과 발음, 억양의 표현을 조율했고, 실제 무대화에 앞서 대사와 음악의 조화를 평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브리튼의 리브레토 작가들과의 논의에서도 피어스는 종종 중재자 또는 감각 있는 비평가로서의 목소리를 더했습니다. 《알버트 헤링》, 《글로리안느》, 《턴 오브 더 스크류》 등의 작품에서도 피어스는 주요 배역을 맡으며, 브리튼의 음악적 비전을 무대 위에서 완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브리튼과 피어스는 예술적 파트너십을 넘어, 20세기 오페라에 있어 작곡가-성악가 관계가 얼마나 밀접하고 창의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3.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와 W. H. 오든(W. H. Auden): 형식미와 문학성의 결합
스트라빈스키와 오든의 협업은 1940년대 후반, 스트라빈스키가 미국 망명 이후 새로운 오페라 프로젝트를 모색하던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스트라빈스키는 신고전주의 양식에 기반한 오페라를 구상하고 있었고, 복잡한 상징과 구조를 품은 문학적 리브레토를 원했습니다. 이에 당시 뉴욕에서 활동하던 시인 W. H. 오든에게 협업을 제안했고, 오든은 자신의 제자인 체스터 캘먼과 함께 대본 작업을 수락하면서 공동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든은 18세기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의 연작 판화 "The Rake’s Progress"에서 영감을 받아 줄거리를 구성했고, 신고전주의적 형식과 운문 구조에 맞춘 대본을 집필했습니다. 그의 시적 언어와 상징적 구성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적 미학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캘먼은 오든의 구조적 초안과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작업을 도우며, 시적 리듬과 극적 긴장감을 정교하게 조율했습니다.
스트라빈스키는 이 대본을 바탕으로 《The Rake's Progress》(1951)를 작곡하며 바로크 오페라 형식을 차용해 현대적으로 재구성했고, 고전적 틀 속에 당대적인 풍자와 심리를 녹여냈습니다. 이 작품은 형식미, 문학성, 음악적 실험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대표작으로 평가받으며, 문학과 음악의 새로운 협업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협업은 단발성이었지만, 작곡가와 시인이 동등한 비전을 공유하며 창조한 보기 드문 오페라로, 이후 다양한 예술 장르 간 협업의 모범 사례로 자주 인용됩니다.
이처럼 푸치니-일리카-자코사, 브리튼-피어스, 스트라빈스키-오든의 협업은 근현대 오페라가 문학, 연기, 작곡의 다차원적인 협업을 통해 어떻게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들입니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역할 분담이 아니라, 예술 전체의 방향성을 함께 고민하고 형성한 창조적 동반자들의 이야기로, 오페라라는 장르가 단순한 음악극을 넘어선 총체적 예술임을 다시금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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