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40. 오페라 작곡가들의 인간관계와 경쟁사 (1)

world1info 2025. 5. 10. 21:07

오페라의 역사에는 단순한 음악적 발전을 넘어, 작곡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협력, 갈등, 우정 등의 인간적인 서사가 숨어 있습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베르디와 바그너, 푸치니와 마스카니, 헨델과 보논치니, 글루크와 피치니 등은 단순한 동시대 작곡가가 아니라, 때로는 서로를 견제하고 영감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이번 글부터 오페라 역사 속 대표적인 작곡가 간의 인간관계와 경쟁사를 조명합니다.

 

1.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 경쟁인가, 루머인가?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와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의 관계는 음악사에서 가장 오해를 많이 받은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흔히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질투하여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지만, 이는 주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문학과 연극, 영화에 의해 부풀려진 루머일 뿐입니다.

역사적 사실

살리에리는 오스트리아 황실 궁정 음악감독(Kapellmeister)이라는 매우 권위 있는 지위를 오래 유지했던 인물입니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빈 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오페라와 종교음악에서 실력을 인정받았죠. 반면, 모차르트는 뛰어난 천재성을 인정받았었지만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궁정 내 입지도 약했습니다. 이로 인해 후대에 ‘실력 있는 젊은 천재(모차르트)’와 ‘권력을 가진 기득권자(살리에리)’의 대립 구도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 기록에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방해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오히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작품을 연주하거나 후원한 기록도 있으며, 모차르트의 아들 프란츠 자비에르 모차르트의 음악 교육을 맡기도 했습니다. 또한 살리에리는 말년에도 “모차르트야말로 가장 위대한 작곡가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왜 루머가 생겼을까?

살리에리를 모차르트의 ‘악당’으로 만든 최초의 사례는 푸쉬킨(Alexander Pushkin)의 1830년대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입니다. 이 짧은 극은 질투에 휩싸인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픽션을 담고 있으며, 이 설정이 나중에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와 영화 아마데우스까지 이어집니다. 특히 1984년 영화 아마데우스는 살리에리를 교활한 궁정 음악가로 묘사하여 대중적 이미지에 강하게 각인시켰죠.

인간적인 접점은 없었을까?

흥미롭게도,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후기 오페라인 『마술피리』를 “음악의 극치”라며 칭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또한 모차르트는 살리에리와 그가 함께 작업하던 이탈리아 대본가 카테리노 마촐라(Caterino Mazzolà)의 의견을 참고하여 오페라 『티토의 자비』의 일부를 수정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2015년 발견된 칸타타 'Per la ricuperata salute di Ofelia'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함께 작곡한 작품으로, 두 사람이 협력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다만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적은 있습니다. 이는 당시 궁정 내의 정치적 상황과 경쟁으로 인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 예로,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살리에리가 자신을 방해한다고 언급했으나 이는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하며 실제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방해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요컨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동시대를 살았고 어느 정도 경쟁적인 구도는 있었지만, 적대적인 관계로 볼 명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살리에리 독살설’은 문학적 허구에 기초한 것입니다.

 

40. 오페라 작곡가들의 인간관계와 경쟁사 (1)


2. 베르디와 바그너 – 서로를 만나지 않은 거장들의 대립적 시선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는 동갑내기 작곡가로, 19세기 오페라계를 양분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음악 세계를 지녔고, 한 번도 실제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서로를 향한 직접적인 비난은 자제했지만, 간접적으로 비판하거나 거리를 두는 발언은 자주 남겼습니다.

베르디의 입장

베르디는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 일정 부분 존중은 하면서도, 그의 이론적 태도나 지적 허영을 경계했습니다. 바그너가 제시한 ‘음악극(Musikdrama)’ 개념이나 무한선율 원리에 대해 “음악은 음악이지 철학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일축한 적이 있습니다.

베르디는 말년에 바그너의 작품에 대해 “음악의 색채감과 관현악은 인상 깊다”고 평가하면서도, “그의 음악은 인간의 감정보다는 관념을 담으려 한다. 나는 거기서 멜로디를 찾기 어렵다”고 평했습니다.

바그너의 태도

반면 바그너는 공공연히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그는 벨칸토 전통을 ‘인위적인 기교’로 폄하했고, ‘베르디의 음악은 감상용이지, 철학적 성찰이 없다’는 식으로 평가절하했습니다. 바그너의 미학은 전통적인 아리아 구조를 해체하고, 오케스트라와 드라마의 융합을 추구했기 때문에, 베르디의 오페라 구조는 그의 기준에선 구시대적이었습니다.

문화적, 철학적 대립

바그너는 독일 낭만주의와 철학, 신화 중심의 오페라를 추구했고, 베르디는 현실적인 감정과 인간의 도덕적 갈등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비교하면, 신화적 서사 대 현실적 인간 드라마라는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사후의 평가

두 사람은 서로를 끝까지 공개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19세기 말 유럽 오페라 팬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베르디파 vs 바그너파’의 논쟁이 형성되었습니다. 심지어 베르디가 사망한 후, 이탈리아 신문은 “바그너보다 인간적인 작곡가가 세상을 떠났다”고 애도했을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