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푸치니와 마스카니, 레온카발로: 베리스모 시대의 경쟁과 불협화음
19세기 말 이탈리아에서는 현실주의를 추구하는 베리스모 오페라가 등장하면서 현실적이고 감정적인 이야기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자코모 푸치니, 피에트로 마스카니, 루제로 레온카발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베리스모의 영향으로 푸치니와 레온카발로는 앙리 뮈르제의 소설 『보헤미안 생활의 장면들』을 바탕으로 각각 『라 보엠』을 작곡하게 되었습니다. 두 작곡가가 같은 주제를 선택하면서 레온카발로는 자신이 먼저 『라 보엠』을 작곡하고 있었으며, 푸치니가 이를 모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푸치니는 언론을 통해 "그가 작곡하고 싶다면 하라. 나는 나의 방식대로 작곡할 것이다. 판단은 청중이 할 것이다"라고 반박했습니다.
이 경쟁은 결과적으로 푸치니의 작품이 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로 인해 레온카발로는 푸치니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두 사람은 공개적으로 비난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두 작곡가는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지만 스타일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푸치니의 『라 보엠』은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특징이며, 레온카발로의 작품은 보다 사실적이고 강렬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한편, 마스카니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통해 사실주의 오페라의 대표 작곡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의 음악은 격정적이고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반면 푸치니는 서정적이고 섬세한 멜로디를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마스카니는 푸치니와 초기에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음악적 방향성 차이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 마스카니는 푸치니의 음악을 비판하며, 자신의 작품과 차별화를 위해 보다 극적이고 강렬한 음악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때로 감정 표현의 과잉으로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6. 바그너와 브람스: 19세기 음악계를 양분한 미학적 전쟁
19세기 유럽 클래식 음악은 단순한 예술의 영역을 넘어, 철학과 정치, 문화적 이념의 전장이 되었다. 그 중심에는 두 거인이 존재했다. 한 명은 오페라를 철학적 서사로 확장한 혁신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다른 한 명은 고전주의의 형식미를 계승하며 순수 기악 음악을 옹호한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였다. 이 둘은 직접적인 인간적 충돌보다는, 음악과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방식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이며 당대 음악계를 양분했다.
음악관의 차이
바그너는 낭만주의 정신을 극대화한 인물이다. 그는 음악을 단순한 오락이나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이라 보았다. 음악, 문학, 연극, 철학, 무대미술 등이 통합되어야 진정한 예술이 된다는 그의 철학은, 특히 그의 후기 오페라들—『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파르지팔』 등—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화성의 기능을 해체하고 반음계적 전개를 통해 음악에 새로운 감정의 층위를 부여했다.
반면 브람스는 전통의 수호자였다. 그는 베토벤의 정신적 후계자를 자처하며, 고전주의 형식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자 했다. 소나타 형식, 푸가, 변주곡 등 정교한 구조 안에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으며, 오페라가 아닌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등에 주력했다.
이처럼 바그너는 음악의 “내용”을, 브람스는 음악의 “형식”을 중시하며, 각기 다른 철학을 지녔다. 이 철학의 충돌은 당대 음악계 전반으로 확대되어 ‘신독일악파’와 ‘절대음악파’라는 두 진영의 대립을 불러왔다.
비평가 한스릭과 신독일악파
브람스를 지지한 대표적인 비평가는 에두아르트 한스릭(Eduard Hanslick)이었다. 그는 『음악의 형식미에 대하여(1854)』에서 "음악은 감정을 묘사하거나 전하려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로서의 형식과 논리를 통해 미를 구성하는 예술"이라 주장했다. 이는 바그너의 ‘표출 예술로서의 음악’ 개념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었다.
반면, 바그너는 자신과 리스트를 중심으로 한 ‘신독일악파’를 통해, 음악은 철학적 내용과 문학적 주제를 동반해야 하며, 더 이상 전통적인 형식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브람스를 “재능은 있으나 낡은 양식에 집착하는 퇴행적 작곡가”라며 조롱했고, 리스트 역시 브람스의 음악을 무색무취하다고 평가했다.
바그너는 『예술과 혁명』, 『음악의 미래』 등 수많은 이론서를 통해 자기 철학을 정당화했고, 그의 이론은 당시 독일 철학계, 특히 쇼펜하우어나 후에 니체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반해 브람스는 침묵 속에서 오직 자신의 음악으로만 응답했다.
대중과 음악계의 양분: 음악을 둘러싼 문화전쟁
바그너와 브람스의 대립은 단순한 음악적 논쟁이 아니라, 19세기 후반 유럽 문화계 전체의 갈등을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바그너파는 혁신과 미래를, 브람스파는 전통과 고전을 상징했다.
- 바그너파는 진보적 예술가, 철학자, 독일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바그너의 음악에 담긴 신화, 철학, 상징주의에 열광하며, 이를 독일 정신문화의 정수라 여겼다.
- 브람스파는 오스트리아 중심의 보수적 귀족, 고전주의 음악 교육자, 그리고 일부 교회 음악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브람스를 베토벤과 바흐의 계승자라 보며, 감정보다는 형식미를 중시했다.
이러한 대립은 음악회 프로그램 편성, 후원자 지원, 평론가 평가, 심지어 출판사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청중들 또한 선호하는 작곡가에 따라 갈라지며, 음악은 ‘취향의 문제’에서 ‘정체성의 문제’로 진입하게 된다.
인간적 관계: 우회적 비판과 냉담한 존중
흥미롭게도 바그너와 브람스는 공식적인 만남이나 직접적 갈등을 거의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바그너는 브람스를 비꼬는 글을 종종 남겼으며, 브람스 역시 바그너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진 않았지만, 그의 사상과 음악을 개인적으로는 탐탁치 않게 여겼다.
한 예로, 브람스는 바그너의 죽음(1883년) 후 그의 음악을 평가해달라는 요청에 대해 “그는 확실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있었다”고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이는 일정한 존중을 보이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힌 발언이었다.
후대에 끼친 영향
이들의 대립은 후세 작곡가들에게 중요한 예술적 지향점을 제시했다.
- 말러는 바그너의 관현악 색채와 브람스의 구조적 긴장을 동시에 받아들여 독자적 음악세계를 구축했다.
- 쇤베르크는 브람스를 ‘진보적’이라 칭하며, 그의 구조 감각을 12음기법으로 계승했다.
- 스트라빈스키는 한때 바그너에 심취했으나, 후기에는 브람스적 절제와 형식을 찬미했다.
즉, 바그너와 브람스는 단순한 대립자가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음악의 지평을 확장시킨 두 축이었다.
바그너와 브람스의 관계는 협업도 아니고, 개인적인 적대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술관은 19세기 음악의 중심축을 갈랐다. 이 대립은 단지 “누가 더 위대한가”라는 논쟁이 아니라, 음악이라는 예술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놓고 벌어진 문화적·철학적 논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반면교사로 삼은 동시에, 20세기 음악의 토대를 함께 마련한 ‘운명적 대립자’라고 할 수 있다.
7. 현대 오페라 작곡가들 간의 영향과 우정: 브리튼,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브리튼과 쇼스타코비치의 우정과 상호 영향
벤저민 브리튼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1960년에 처음 만나 이후 깊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이들은 냉전 시기에도 불구하고 깊은 우정을 유지했습니다. 브리튼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 감명을 받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적 표현과 구조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작품에 반영했으며, 쇼스타코비치 역시 브리튼의 음악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두 작곡가는 서로의 작품을 공유하며 조언을 주고받았고, 이는 브리튼의 《베니스에서의 죽음》과 같은 작품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감정의 억제와 내면의 갈등을 표현하는 부분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영향이 두드러집니다.
브리튼과 스트라빈스키의 관계
브리튼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도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에서 비정형적인 리듬과 복잡한 오케스트레이션을 통해 새로운 음악적 표현을 시도했습니다. 그의 리듬은 전통적인 박자 구조를 넘어서는 독창성을 보여주며, 이는 후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브리튼은 스트라빈스키의 리듬과 오케스트레이션 기법을 자신의 작품에 적용했으며, 이는 브리튼의 오페라에서 독특한 음악적 색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브리튼의 오페라는 영국적 정서와 현대적인 음악 기법이 결합된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그는 전통적인 오페라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주제와 표현을 통해 새로운 오페라의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이처럼 현대 오페라 작곡가들은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음악적 방향을 모색했습니다. 그들의 우정과 협업은 현대 오페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결론: 경쟁은 창조의 원동력인가, 소모의 불씨인가
오페라 작곡가들 간의 경쟁은 단순한 악의나 시기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대의 음악적 이상, 철학, 사회적 배경 속에서 빚어지는 복합적인 드라마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때로 서로를 자극하여 걸작을 낳기도 하고, 때로는 오해와 갈등으로 인해 잊혀진 작품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오페라의 역사 속에 숨겨진 작곡가들의 인간사는 우리가 음악을 더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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